Denon AH-D1200 헤드폰
작년 이맘 때, 회사에서 일하며 음악들을때 쓸 수 있는 헤드폰을 찾고 있었다. 회사 사무실은 무선 지뢰 지대이므로 무선 헤드폰을 쓰긴 무리가 있었다. 음악이 끊기거나 내 마우스/키보드가 헤드폰에 의해 간섭을 받거나. B&W PX를 썼을때도 느꼈지만 괜히 사무실에서 조금 편하자고 무선 이어폰으로 갔다가 더 피곤해지는 느낌이니 어차피 책상 앞에서 앉아있을때만 들을거 그냥 심플하게 유선으로 꼽아 쓸 수 있는 걸로 찾아보기로 했다. 집에서 쓰는 K712를 가져가보기도 했는데, 역시 오픈형 헤드폰은 내가 듣기에 차음의 문제도 있고 남에게도 소리가 새다보니 (내가 볼륨을 그리 크게 듣는 편은 아니라 주변에선 그리 잘 들리지는 않는다곤 했지만) 사무실에서 쓰긴 어려웠다.
유선 헤드폰, 클로즈백이면서, 적절히 내 취향에 맞는 고음 성향이고 괜찮은 음질일 것. 도쿄 갈때마다 e이어폰 매장에 들러 이것저것 청음해보곤 했는데, 적절한 가격대별로 모아둔 코너에서 이것저것 듣다가 마음에 쏙 든 녀석이 있었다.
데논 D1200 샀읍니다 거의 10만원 선 가격인데 소리는 꽤 좋음! 무선 기능 노캔 이런거 없이 초 기본적인 구성이고 그냥 유선으로 회사에서 쓸 예정 pic.twitter.com/hMQmv5C5oQ
— 즈북/ずぶっく (@zvuc_) 2018년 6월 23일
그래서 구입한 것이 바로 데논의 AH-D1200이라는 헤드폰.
소리
데논의 오디오 제품을 써본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헤드폰은 처음 듣자마자 든 생각이 “이 가격에 이런 소리가?” 였다. 2018년 6월 당시에는 이게 일본에서도 출시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어서 리뷰나 후기가 많이 없긴 했는데 (한국에는 발매조차 되지 않았었다) 몇개 찾아본 바로는 대체로 내가 청음해보고 느낀 장점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어폰이든 헤드폰이든 들어본 적 없는 제품을 들어볼 때 가격대와 상관없이 몇가지 분류로 나뉘는데,
1. 꽂자마자 어우씨 이게 뭐야 하고 빼버리는 것들
2. 한 10초 듣고 음 내 취향은 아니구나 하고 빼는 것들 (대체로 고음부가 죽었거나, 저음이 너무 세거나, 중음역이 강조된 것들)
3. 어 나쁘지 않은데 하고 계속 들어보게 되는것들 (2번의 기준은 통과했고 이후는 미세한 튜닝에 의한 성향의 차이인 경우)
일단 이 헤드폰은 3번에 속했다. (그러니까 샀겠지) 헤드폰은 이어폰에 비해 그닥 많은 제품을 다양하게 써본 경험이 있는건 아니라 비교할 대상이 많지 않은데, 데논 D1200은 첫 인상에서는 클로즈백임에도 K712와 상당히 흡사한 사운드 시그니쳐를 가진 것 같았다. 이것 저것 많이 들어봤는데 우선 비슷한 가격대의 헤드폰중에서 이렇게 맑은 고음을 내주는 헤드폰이 정말 많이 없었다.
고음이 맑을 뿐만 아니라 해상력도 훌륭했다. 이제까지 쓰던 고가형 이어폰이나 헤드폰과 비교했을때 소리가 뭉개져 묻힌다는 느낌이 없었다.
대신 저음은 다소 빈약한 편이다. 평소 둥둥거리는 저음을 좋아하는 편이라면 이 헤드폰은 뭔가 아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장되지 않은 밸런스 있는 소리를 원한다면 요즘 온통 저음위주의 헤드폰만 가득한 시대에 몇 안 되는 가뭄속의 비같은 존재다. 저음이 없는 건 아니고, 저음이 많은 곡에서는 제대로 아래를 받쳐준다.
착용감
오디오 기기를 구입할때 소리는 최우선 항목이지만 일상에서 계속 써야 하는 물건인 만큼, 이제는 소리가 조건에 맞아도 다른 편의사항이 맞지 않으면 선뜻 구입하기가 어려워진다. B&W PX를 팔아버리게 된 이유중 가장 큰 것이 이어패드와 헤드밴드가 통증을 유발한다는 점이기도 했고.
장시간 착용시 편안함은 오래 사용해봐야 알수 있는 부분이므로 청음샵에서 몇십분정도 들어봐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 구입하기 전에 검증하기 좀 어렵기는 하다. 그래서 최대한 만져봤을때 이어피스의 쿠션감, 유닛의 무게, 헤드밴드의 쿠션 등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데논 D1200은 그런 점에서 전부 합격점을 얻었다.
이어피스의 쿠션은 인도어/아웃도어 휴대 겸용 헤드폰인 걸 감안했을때 충분히 많은 양의 쿠션을 제공한다. 이어 컵의 사이즈도 작지 않은 편이며 귀를 완전히 감싼다. 소니 1000XM3의 쿠션은 더 푹신하지만 얕기 때문에 귀가 스피커에 닿아 눌리는데 (이게 또 장시간 착용시 피로의 원인이 된다) 데논 D1200은 쿠션 자체는 좀 더 단단하지만 더 두껍기 때문에 귀가 눌리지는 않는다.
이어피스 안쪽을 보면 망사 사이로 드라이버가 살짝 투과되어 보일 정도로 얇은 메쉬로 덮여있는데 이게 혹시 이 제품의 맑은 고음의 비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드밴드의 쿠션은 엄청 푹신한 정도는 아니지만 (이쪽도 역시 QC35를 따라올 자가 없는듯 하다) 적당히 부드럽게 되어있는 느낌이다.
머리 크기에 맞게 익스텐드가 되는데 이 정도까지 늘어난다.
하지만 위에 이야기한 모든 것들에 더해 이 헤드폰이 왜 장시간 써도 편안할수 있는가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이유는 아마도 가벼운 무게일 것 같다.
D1200의 무게는 케이블 제외 260g.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던 B&W PX는 335g, 소니 1000XM3가 255g이라고 한다 (진짜? 더 무거운거같은데)
디자인
디자인도 뭔가 요즘 무선 겸용으로 나오는 헤드폰들을 보면 이런저런 버튼이 달려있고 구멍도 많고 해서 좀 너저분한데, 이 녀석은 그런거 없고 유선 오디오 케이블이 들어가는 구멍 하나밖에 없어 깨끗하다.
이어피스의 재질은 무광으로 굉장히 부드러워보이고 실제로 만져도 부드럽다. 다만 손으로 만졌을때 얼룩진다는 단점은 있다. 그러면서도 행어 프레임은 알루미늄으로 되어있어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느낌을 준다
참고로 흰색 모델도 있다. D1200BK가 블랙이고 D1200WH가 화이트. 흰색은 이어컵은 무광 흰색으로 되어있고 프레임은 살짝 골드 톤의 알루미늄과 헤드밴드는 갈색으로 더 고급스런 이미지를 노린것 같은데, 역시 검은색 아닌 헤드폰은 착용시 너무 튀어보일 것 같고, 또 흰색이 너무 때가 잘 탈것같아서 무난한 블랙으로 골랐다.
개인적으로 저 매끄러운 곡선이 매우 마음에 든다.
그 외
그리고 이건 구입하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이어피스가 접힌다.
이렇게 포개서 부피를 줄일 수 있다. 살짝 무리하는거 아냐? 싶어서 불안하긴 했는데… (대부분 회사에 그대로 둔지라 저렇게 많이 갖고다닐 일은 없긴 했다)
오늘 공홈을 보니 정석인 접는 방법은 이렇게 하는게 맞는거같다(..)
아무튼 요점은 이어피스의 90도 회전도 가능, 접기도 가능하다는 말씀 되시겠다
케이블은 iOS 대응 리모콘이 달린 케이블과 그냥 스트레이트 케이블이 패키지에 들어있다. 이어폰에 연결되는 부분은 특이하게도 3.5파이가 아닌 2.5파이다. 나는 리모콘을 쓰지도 않고 극혐하기 때문에 스트레이스 케이블만 꺼내고 리모콘은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먹었다… (오늘 공홈 페이지 보면서 기억함)
30만원 이하 가격대 유선 헤드폰의 “정답”
아무튼 부차적인 내용 다 걸러내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 헤드폰은 정말 어디선가부터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가성비 갑 헤드폰이라는 말이다.
2016년 경에 Zero Audio라는 일본의 메이커에서 출시한 저가형 이어폰이 예상 외로 너무 좋은 사운드 튜닝을 들고 나와서 오디오 커뮤니티를 뒤집어 놓은 적이 있었는데, The Verge는 “지금 하던 일 멈추고 당장 이 $38짜리 이어폰을 사라” 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으로 기사를 내기도 했다. 보통은 제목낚시라고 까이겠지만 저 이어폰은 실제로 들어본 사람을 알겠지만 정말로 최소 $200달러 이하 이어폰은 다 씹어먹는 급의 소리면서 가격은 5만원도 안 했던지라… 웃긴건 같은 회사에서 출시한 더 비싸고 스펙도 좋았던 상위모델보다도 저 Carbo Tenore이라는 이어폰만이 소리가 좋았던 점이다. (실제로 궁금해서 비교청음해보려고 상위모델을 구입했던 지인이 있었다) Zero Audio 회사에서 어쩌다 실수로 잘못 엄청 잘 튜닝해놓아서 앞으로 더 좋은거 못 만드는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이 데논 헤드폰을 들었을때 느낀게 딱 그런 느낌이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가격에 이런 소리가??” 급으로… 비슷한 상황인게 데논에서 나온 이 헤드폰의 상위모델 헤드폰을 같은날 매장에서 다 들어봤는데 한 4-50만원정도 가격대의 모델까지 올라가지 않는 이상 소리가 전혀 좋아진다는 느낌이 없었다 ㅋㅋㅋ (D1200와 외관이 거의 똑같이 생긴 블루투스 모델도 있어서 들어봤는데이건 진짜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타 모델 대비 소리가 너무 안 좋았다) 완전 팀킬 헤드폰 아니냐구.
그래서 이렇게 좋은 이 헤드폰의 가격이 과연 얼마냐고요?
13,000엔. (약 13만원)
정가도 이미 싼데 나는 심지어 매장에 마침 A급 중고가 있어서 한 몇천 더 깎아서 사왔다. ㅋㅋㅋㅋㅋㅋ
음향 기기 관심 있는 회사 동료에게 이 헤드폰을 사와서 들려주니 굉장히 만족해 하더라. 이 헤드폰 가격이 얼마일거 같냐고 맞춰보라 했더니 최소 40만원 이상은 할것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가를 알려주니 ??!??! 하는 표정이… 그리고 결국 같은 헤드폰을 질렀다고 한다
음향기기에 ‘정답’이 없는건 잘 안다 (오답은 있지만!) 사람마다 취향도 다 다르고 추구하는 음색도 다르기 때문에. 근데 이 가격대에 이 소리면… 솔직히 별로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곧바로 추천해 줄만한 수준인 것 같다.
20만원 이하 이어폰을 다 씹어먹는 4만원대 이어폰 Zero Audio Carbo Tenore이 있다면, 30만원 이하 헤드폰 잡아먹는 10만원대 헤드폰이 생겼다.
데논 AH-D1200.